사람과사랑사이 2017.03.03 23:13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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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좋은글귀 2015.11.06 15:01

 

 

 

비누가 손을 빠져나간다
비누가 손을 지나 바닥을 빠져나간다
비누가 조금 전 한 말들이 말풍선을 터뜨리고 띄우며 강으로
빠져나간다

바다로 사라지는 어떤 결의들
하염없는 비누들 비누의 이웃들

새와 나무와 사람과
거미의 하루와 기린의 무늬가 거품이 될 때까지
비누의 손으로 살아가는 비누들
비누가 손을 잡을 때
비누는 부피와 피부가 없고 다른 생각이 없다
우리는 날마다 괜찮고 조금씩 하루를 없애고 있네
어떤 말들은 눈송이의 친구처럼 커지고, 내리는데

세계와 나 사이에 투명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불안을 머금은 유전자들

비누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오른손을 펴보렴
날마다 우리들의 손에 다른 손들이 빠져나간다


비누 / 최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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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랑사이 2015.10.20 10:27

 

 

 

사람을 만나는 순간,
중고의 삶을 시작하는 가랑이

광부들의 갱도만큼 어두웠지.

유년의 인디고 물감이 빠진 자리엔
상처마다 덧댄 물고기 패치가
아가미를 뻐끔거려.

엄마의 손을 놓친 것들은 왜 멋이 있을까?
서쪽으로 돌아 나온 것들은 왜
명찰이 없는 것일까?

유령처럼 미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피 묻은 행려병자의 생애를 빨면
해변의 석양이 배어 나오기도 해.
누군가 먹다 만 데킬라 선셋의 취기,

접어 올리지 못한 그림자의 밑단과
후렴뿐인 유행가의 이별도
뒷모습의 치수로만 슬픔을 표시한다지.

가장 아픈 곳은 사람의 손을 탄 곳일 텐데?

저마다 폼을 잡는 세계에서
이별은 가장 근사한 워싱의 방식.

타인의 상처가 옅어질수록
서로를,
바다로 알고 헤엄쳐 다니려 하지.


골드러시 / 기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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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랑사이 2015.09.06 11:12

 

 

 

 

 

물로 만든 심장을 갖고 있어요 나 당신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달에 이끌리는 거예요

 

발가락 비대증을 앓고 있어요 나 당신
거침없이 늘어나는 심장이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요


만조 만월 부풀어 오르지만 터지지 않는 것
발톱이 빠질 때까지 걸어야 해요
길은 길로 이어지고 지도는 백지인데
당신은 어디 있나요


출렁이고 있어요 나 당신

어제는 볕이 좋길래
심장을 쏟았어요


볕이 닿는 곳마다
하얗게 곰팡이가 피었어요
피다, 는 산책하는 길이에요
실종이 다반사예요
눈부시니 보기 좋았어요


고양이 척추처럼 둥그런
반월의 심장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무딘 날이라도 훔치지 않는 심장은
없대요 심장은 상처니까요 벼만 남은 날개 아래
심장이 있어요 사라지지 않는
물로 만든 심장이에요 나 당신


여자 / 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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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좋은글귀 2015.09.06 11:09

 

 

 

 

 

조용히 조용을 다한다
기웃거라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
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

나는 나대로
극락조는 극락조대로

먼지는 먼지대로 조용을 조용히 다한다


먼지가 보이는 아침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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